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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연행사의 ‘천주당’ 견문기(2)

장경남 쪽지

  연행사들의 주된 관심사였던 천주당 관람은 18세기 후반에 들어서 제약을 받게 된다. 이승훈이 1783년에 사행을 하여 1784년 북당의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귀국하여 교회 창설을 주도하고, 1785년 봄에 형조에서 명례방 집회를 적발한 일과 1791년 10월의 진산사건 등으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의 강화되자 연행사신들의 천주당 출입도 어려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영향은 이 시기 이후에 연행을 했던 연행사들의 천주당 견문기에서도 드러난다. 서유문의 [무오연행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근래는 아국 사람이 이곳에 가는 일이 없는지라, 아국 사람이 이르매 지키는 자가 물어 가로되, ‘이 곳에 다님을 귀국에서 금한다 하더니 어찌 왔느뇨?’ 하니, 누가 전하는 말인지 모르되, 지극히 이상하더라.

 

  연행사들도 천주당을 가는 일이 없으며, 천주당 사람들도 조선에서 천주당 관람을 금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서유문도 천주당을 직접 관람하지 않았다. 종자 치형이 보고 온 것에 기대어 천주당 관람기를 적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과학과 문물 기기, 그리고 미술에 관한 기록은 여전하다.

  19세기초의 연행록인 [계산기정]에는 “당 내부에 장치한 것이 구경거리가 많다. 앞서 옥하관에 묵을 때에도 들어가 보는 사람이 많았는데, 한번 사학(邪學)으로 금지된 후부터는 서로 통행하지 못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천주당 관람은 금지되었지만 그곳의 문물 기기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음을 볼 수 있다. 이어지는 시에서도 “오묘한 재주 신조에 가깝고/ 보물은 산같이 쌓여 있네”라고 표현할 정도로 서양 문물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부연일기](1828)나 [연원직지](1832)의 작자도 마찬가지였다.

 

  천주당은 지극히 해괴하고 참혹하여 볼 수가 없기로 우리나라에 돌아가는 날에는 정녕코 연경 가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절대로 이 관에 발을 들여놓지 말도록 하기로 하였다. 선무문(宣武門) 안 내성(內城) 동쪽 성 밑 길가에 서양관이 있는데 거기에 천주당이 있다. 밖에서 보니 집 제도가 아주 기묘하고 옥하관(玉河館)보다 배나 크고 기이한 구경거리가 많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신유사옥(辛酉邪獄) 뒤부터는 우리나라 사람은 이 관에 들어가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이 글은 1828년의 사행기록인, 작자미상의 [부연일기]의 내용이다. 천주당 방문은 신유사옥 이후에 금지되었고, 천주당은 지극히 해괴하고 참혹하여 볼 수가 없는 곳으로 여기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작자는 대신 러시아 정교의 성당인 아라사관을 방문한 것이다. 아라사관 견문 기록도 서양 과학 문물 기기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집 제도에 대해서는 “정밀하고 기묘로우며”라고 하였고, 기물은 “치밀하고 특이”하며, 그림은 “솜씨가 능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어 자명종과 자명악에 대해서도 일일이 기록하고 있어, 천주당 관람이 금지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동경과 관심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경선 또한 김창업, 홍대용, 박지원의 천주당 기록을 집대성하여 「서천주당기」를 썼다. 천주당 방문 금지로 인해 선배들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듯한데, 어쨌든 이를 통해 서양 문물 기기나 그림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서교, 즉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연행사와 연행시기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천주당이 서양 선교사 마테오 리치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사실은 천주당을 관람했던 연행사들에게는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리고 서양인들이 믿고 있는 천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이기지는 서양 선교사들에게 인류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므로 사해의 모든 인류는 형제간이니 수만 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형제라고 한 말을 기록하였다. 이의현은 “서양의 도(道)는 하늘을 섬기는 것을 주로” 한다고 하면서 천주교가 유교ㆍ불교ㆍ도교와 차별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홍대용도 선교사 유송령과 필담을 나누면서 서양 사람들이 따로 높이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어떠한 것이냐고 묻고, 또 유교, 불교, 도교에서 숭상하는 것을 거론하며 서양은 어떤 것을 숭상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서 유송령이 대답한, “우리 나라의 학문은 사람들에게 사랑함을 가르칩니다. 하느님을 높이되 만유(萬有)의 위에 숭배하고, 남을 사랑하되 자기 몸처럼 합니다.”라는 진술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기본 교리는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박지원, 김경선도 마찬가지이다. 박지원은 천주교가 부화함과 거짓을 버리고 성실을 귀하게 여겨 하느님을 밝게 섬김으로써 으뜸을 삼으며, 충효와 자애로써 의무를 삼고, 허물을 고치고 선을 닦는 것으로써 입문을 삼으며, 사람이 죽고 사는 큰 일에 준비를 갖추어 걱정을 없애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김경선은 천주교를 부화와 거짓을 끊고 정성과 믿음을 귀하게 여김으로써 상제를 섬기는 것을 종지로 삼고, 충효자애를 공무로, 천선개과를 입문으로 삼으며, 생사 같은 큰일에 대비하여 큰 걱정이 없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스스로 근본을 찾고 근원을 궁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19세기의 김경선에 이르자 천주교에 대한 이해는 더욱 심화되었다고 하겠다.

  연행록의 천주당 견문기 가운데 김순협의 [오우당연행록]에는 예수에 관한 기록이 있어 흥미롭다. 김순협은 천주당의 제도를 설명하면서 예수의 상을 묘사하였는데, 묘사 과정에서 예수의 탄생과 죽음, 부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천학실의]에 실려 세상에 전한다고 하여 김순협은 천주교와 관련된 서적을 독서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김순협은 다른 연행사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천주교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천주당을 관람했던 연행사들은 이미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 천주당을 세운 내력과 천주교에 대한 기본 교리는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천주교에 대한 이해와는 달리 그에 대한 태도는 달랐다. 김순협과 홍대용만 천주교 서적의 관련 내용을 인용하거나 선교사의 말을 인용하고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고 대부분은 부정적이었다.

  이를테면, 이의현은 “스스로 높은 체 한다”고 했고, 박지원은 “뜻한 것이 너무 고원하고 이론이 교묘한 데로 쏠리어 도리어 하늘을 빙자하여 사람을 속이는 죄를 범하여 제 자신이 저절로 의리를 배반하고 윤상을 해치는 구렁으로 빠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하여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천주당 방문을 금지한 19세기에 들어와 더욱 심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1803년에 사행을 한 이해응은 “어디서 온 일종의 학설인데/ 마침내 윤강을 해치는가”라고 읊어 천주교는 윤리기강을 해치는 근본도 없는 학문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경선 역시 천주교의 교리에 대한 이해는 깊었지만, “입지가 높은 데에 치우치고 말이 교묘한 데에 치우쳐서,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며 의리를 어기고 인륜을 상하게 하는 과목”으로 여기고 있다.

  심지어 [부연일기]에서는 러시아 정교의 성당을 견문한 기록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저 오랑캐가 관에서 사는 것은 그들의 풍속을 숭상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하면서 선교사를 ‘오랑캐’로 부르고 있다. 그들에게는 “천주학 외에는 다른 학문이 없었다”고 하면서, 그들의 서적은 “두서너 줄을 보고 분명히 이단임을 알았다”고 단정하였다. 또한 “그 학문이 유독 이들뿐만 아니라 서쪽이나 남쪽의 먼 변방은 애초부터 오도(吾道 유교를 말함)를 모르고 서양 등지는 천주학을 하지 않는 데가 없을 듯하다”고 한 것이나, “중국 문자를 익혀 귀국시켜 전달하게 하여 먼 지방으로 하여금 성인의 도가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 부분에 이르면, 작자의 세계관은 동양 혹은 중국 중심의 사고에 입각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천주당 견문기를 통해서 조선조 지식인의 서학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조선조 지식인은 서양의 선진 물질 문명은 우리의 생활을 이롭게 하는 도구로 인식하여 그것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주당 방문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물 기기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결코 그들에게 뒤처지지 않는다는 자존심은 갖고 있었다. 서교에 대해서 보인 연행사들의 부정적인 태도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천주교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밑바탕에는 동양 사상의 우월감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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