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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연행사의 ‘천주당’ 견문기(1)

장경남 쪽지

  조선에 서양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중국을 통해서였다. 동양적 국제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던 조선에 서양은 새로운 존재였으며 중국에서 유입되고 있던 서학(西學)은 기존의 지식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1601년 마테오리치의 북경 거주를 계기로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유럽에 관한 지식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중국에 진출한 서양 선교사들은 서적 출판 등의 방법을 통해 인문지리학이나 자연과학 지식을 중국인들에게 전달해 주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조선은 중국에 사신을 보내면서 이들 연행사가 견문한 사실이나 입수된 서양서들을 통해 점차 서양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연행사들은 자연스럽게 서양의 선진 문물을 체험했고, 그 관심은 연행록을 통해 표현되었다. 연행록은 상층 사대부 남성에게만 읽히지 않았다. 국문본 연행록의 존재가 이를 반증한다. 한문을 읽을 수 없는 계층을 위해서 따로 국문본을 마련했다. 김창업을 비롯한 홍대용, 박지원이 한문본과 국문본의 연행록을 동시에 남긴 것은 좋은 예가 된다. 조선조의 이국 체험은 이렇게 연행록을 통해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서학의 전래와 수용에 있어 연행록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연행사들은 연행을 떠나기에 앞서 선배들이 기록한 연행록을 읽고 학습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천주당에 관한 지식도 미리 습득을 했다.

 

  우리나라의 선배들로 김가재(金稼齋)와 이일암(李一菴)같은 이들은 모두 식견이 탁월하여 후세 사람들로서는 따를 수 없는 바요, 더구나 중국을 옳게 본 데도 쳐줄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천주당(天主堂)에 대한 기록들은 약간의 유감이 없지 않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으로는 잘 미칠 수 없는 것이고, 또 갑자기 얼핏 보아서는 알아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뒷날 계속해서 간 사람들에게 이르러서는 역시 천주당을 먼저 보지 않을 자가 없지마는 황홀 난측하여 도리어 괴물 같이만 알고 이를 배척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안중에 아무 것도 보지를 못한 까닭이다. 가재는 건물이나 그림에만 상세하였고, 일암은 더욱이 그림과 천문 관측의 기계에 자세하였으나 풍금(風琴) 이야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홍대용이 서양 사람들의 기교를 논하면서 한 말을 박지원이 그의 [열하일기]에 기록한 내용이다. 홍대용은 김창업과 이기지의 천주당 견문기가 후대의 연행사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천주당 견문 기록도 몇 가지 면으로 치우친 점도 지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을 통해서 선배들의 천주당 견문기는 후대 연행사의 호기심을 자극한 동기가 되었으며, 서학에 대해 어느 정도의 예비 지식을 갖출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연행록에 기록된 천주당 견문기는 기록자의 천주당에 대한 관심과 예비 지식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난다. 이에 따라 천주당 견문기의 내용이나 서술 분량도 각각 다르게 나타났다. 서학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연행사들이 서학 가운데 가장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과학과 문물 기기와 미술이었다. 18세기 초인 1712년에 연행을 했던 김창업의 경우에는 천주당에 대한 견문기가 간략하면서도 담담한 기술에 그치고 있다. 자명종에 대해서는, “이것은 자명종이란 것이니 이상할 게 없고”라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풍금에 대한 기록도, “역시 한번보고 싶었으나 요즈음 금지하고 잇다는 것을 들었으므로 지나갔다.”는 식의 기술로 그치고 있다.

  1720년에 사행했던 이의현의 경우에는 혼천의와 자명종에 대해서 “상당히 교묘하여 볼 만하다”고 기술하면서, 실물을 보지 못하였기에 “사정이 어긋나서 보지 못했으니 몹시 한탄스러운 일이다.”고 안타까워하는 장면을 보면, 서양의 문물 기기에 대해 상당한 호기심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기지 또한 1720년에 사행을 했고, 동천주당, 서천주당, 남천주당을 방문하였다. 그의 [일암연기]에는 선교사들과 필담을 나누고 서양 문물기기인 혼천의ㆍ자명종ㆍ천리경ㆍ만년필ㆍ성냥 등과 서양화책ㆍ지도ㆍ지구의 등을 본 내용과 서양떡(카스테라)과 포도주를 대접받고, 선교사들을 사신의 관소로 초대하여 교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일암연기]는 가장 활발하게 천주당을 방문하고 선교사들과 교류한 기록인 것이다. 특히 혼천의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서 동당의 선교사 서무승(徐懋昇)으로부터 혼천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날의 경험을 「혼의기(渾儀記)」라는 글로 남길 정도였다.

  이전의 어떤 연행사보다도 천주당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 따라서 그에 대한 예비지식도 상당히 갖추고 있었던 이는 바로 홍대용이다. 홍대용은 북경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구경처로 천주당을 꼽았다. 천주당 견문기의 내용도 천주당의 유래, 천문학과 같은 과학기술과 서양 문물 기기, 회화, 음악, 천주교 등 다른 연행록에서 볼 수 없는 아주 다채로운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홍대용의 천주당 견문기는 과학적 지식을 동원한 세부 관찰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작자의 박물학적 관심 및 지식이 천주당 견문기를 통해 집약된 듯하다.

 

  문을 나려 서편 한 집에 이르니 이는 자명종 감춘 집이라. 정당에서 말을 수작할 때에 때때 웅장한 종성이 들리니 이곳에서 나는 소리라. 먼저 그 집 제양을 보니 서너 길의 표묘한 집을 지었으니 넓기가 서너 칸이다. 남편 처마는 다 널로 빈지를 쌓고, 당 중앙에 한 아름 둥근 쇠고리를 박고 고리 위에 열두시와 구십육각을 그리고 각각 서양국 글자로 시각을 표하고, 가운데 조그맣고 둥근 구멍에 쇠막대 부리 두어 치를 나오게 하고 그 위에 가로로 쇠를 박아 시각을 가르키게 하였더라.

 

  이 글은 자명종에 대한 설명이다. 자명종을 두는 집의 외양 묘사부터 자명종의 모양과 작동원리까지 자세히 기술하였다. 홍대용의 치밀한 분석을 통해 서양 기기에 대한 열의를 느낄 수 있다.

  홍대용은 연행을 하기 전인 29세(1759)때 전라도 나주에서 과학자 나경적(羅景績)의 도움을 얻어 3년의 노고 끝에 혼천의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혼천의를 고향 수촌(壽村)으로 옮겨 사설천문대라고 할 수 있는 롱수각(籠水閣)에 올리고, 이곳에 자명종, 통천의, 측관의 등을 갖추어 두고 연구를 하였던 인물이다. 따라서 천주당의 서양 과학 문물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 결과 천주당 견문기는 주로 서양 과학에 집중되고 있다.

  과학 문물에 못지 않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서양 미술이었다. 거의 모든 천주당 견문기에 천주당 외벽의 벽화는 물론이거니와 예수상, 성모상 등의 소상(塑像), 내부의 회화 및 초상화에 대한 기록이 있음은 이를 증명한다.

  김창업이 천주당 북쪽 벽의 소상을 보고, “얼굴은 살아 있는 듯했다”고 묘사한 이래 거의 모든 연행사들은 소상이 실물과 다를 바 없는 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의현은 벽화를, “벽에는 음귀를 많이 그려서 선방의 시왕전과 같다. 보기에 어둡고 밝은 기상이 없으니 괴상한 일이다”고 서술하여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홍대용이 벽화를 보고 나서, “둘러보매 실경을 연상케 하여 실지 그림이란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라고 한 표현과 상반되는 서술이다. 이의현과 홍대용이 서학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양화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박지원의 천주당 견문기록인 「양화(洋畵)」에 잘 드러난다. 천주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서양화에 대한 평가는 그렇지 않다. “이제 천주당 가운데 바람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구름과 인물들은 보통 생각으로는 헤아려 낼 수 없었고, 또한 보통 언어ㆍ문자로는 형용할 수도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동양화와 서양화를 비교하여 서양화의 장점을 피력한 내용을 보면 서양화에 대한 높은 식견을 엿볼 수 있다. 즉, 동양화는 원근세, 음양법에 대한 인식이 결핍되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함과 입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 서양화법은 성근 먹으로 허술하고 거칠게 하며, 귀, 눈, 코, 입, 터럭 사이를 번지기 기법으로 윤곽을 잡았을 뿐인데도 실제로 보면 치수가 딱 맞을뿐더러 음양의 향배가 잘 어울려 숨을 쉬고 꿈틀거리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고 하였다. 동양 회화만 보아오던 박지원에게 단지 얼마간의 붓놀림만으로도 대상을 객관적으로 생생하게 재현해낸 서양화법은 커다란 충격이었음에 틀림없다.

  이계호가 진술한, “화법은 고사하고 채색을 어찌 칠하여 원근 심천이 획획이 분명하여 지척에 보아도 진가를 분간하지 못하게 그렸는지 신통신통하였다.”라는 내용을 보아서도 서양화의 원근법과 음양법은 조선 사대부에게 새로운 화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인에게 새로운 서양화법은 “낱낱이 살아 있는 사람 같아서 황연히 서로 수작을 할 듯하니 서양국 그림이 자고로 유명하나 어찌 이같이 기이한가 생각하였다”라는 진술로 보아, 이미 당시의 조선 문인들에게 상당히 알려졌던 것이다.

  1727년에 사행을 했던 강호보의 [상봉록] 가운데, “이번에 들으니 서양국 화법이 천하에 독보하다 하매 홍만운으로 하여금 천주당에 가 서양인을 보고 영공 화상 그리기를 청한대”라는 기록을 보아도 당시에는 서양화의 우수성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고 하겠다.

  당시의 조선 사람들에게 있어 서양화는 이처럼 매우 놀랍고 신기한 그림 바로 그것이었다. 어쨌든 사행 과정을 통해서 조선 사람들은 서양화라는 이질적인 존재를 알게 되었고, 또한 얼마간의 관심과 흥미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사신들이 선물로 가지고 들여 온 서양화 작품들을 직접 눈으로 대할 수 있는 기회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조선의 화가들도 서양화에 대한 이해와 안목을 어느 정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상호봉시 2016.05.18. 11:19 am 

사양재 9대손으로서 상봉록을 공부하다 검색하다가 본글을 보게되어 가입도 했습니다. 앞으로 공부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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