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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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치욕, 허구적 상상으로 극복한 [박씨전](1)

장경남 쪽지

 

  ▣ ‘박씨전’인가, ‘박씨부인전’인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박씨전]은 필사본과 활자본의 두 종류이다. 방각본 소설은 전하지 않는데, 그 까닭이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 그러나 필사본이 73종이나 되고, 활자본은 6종이나 전하고 있어 고전소설의 이본 숫자로는 [춘향전]과 [구운몽]에 이어 가장 많은 수에 달한다. 이 작품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요소이다.

  [박씨전]의 이본이 많은 것에 못지않게 이 소설의 명칭도 박씨전, 박부인전, 박씨부인전, 명월부인전, 정경충열명월부인 박씨전, 조선국충열부인 박씨전, 박씨부인언행장 등과 같이 다양하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물론 ‘박씨전’이고, 원본에 가장 가까운 이본도 명칭을 ‘박씨전’이라 하고 있다. 따라서 올바른 명칭은 ‘박씨전’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 작품은 종종 ‘박씨부인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잘못이다. 그 이유를 몇 가지 들어 보기로 하겠다. 우선, 대부분의 이본은 명칭을 ‘박씨전’이라고 하지 ‘박씨부인전’이라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박씨부인전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 고전소설의 제목을 보면 대부분 주인공의 이름 밑에 ‘씨’나 ‘부인’이라는 말은 붙여도, 씨 다음에 부인을 연속해서 붙이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또, 박씨부인이라고 할 때는 박씨의 부인으로 오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는 이시백의 아내 박씨는 이씨 부인은 될지 몰라도 박씨 부인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박씨전]의 여러 이본 가운데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필사본 [박씨전]이 가장 이른 시기에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사 연대도 가장 빠르고 보존상태도 양호하기 때문에 이 작품을 원본에 가까운 우수한 이본으로 여긴다. 1910년대에는 많은 활자본 󰡔박씨전󰡕이 출판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출간 당시에 개작한 작품들이 적지 않다.

 

▣ 현실적 패배를 정신적 승리로

 

  [박씨전]은 고전소설 중 비교적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재주와 덕을 겸비한 여주인공 박씨의 활약을 그린 한글소설로 작자와 연대를 알 수 없다. 이 소설은, 능력은 뛰어나지만 못생긴 외모 때문에 가정에서 남편에게 천대를 받다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허물을 벗은 후에는 미모의 여인으로 탈바꿈하면서 남편과 화목하게 지내 가정의 갈등을 해소하고, 국난을 당하자 영웅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국가적 갈등까지 해소하는 활약을 펼쳐 마침내 임금과 조정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주인공 박씨의 활약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소설은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소설 내용 중 역사상에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제재로 한 소설이기에 역사소설이라고 한다.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기 때문에 전쟁소설이라고도 한다. 여주인공 박씨의 영웅적 활약을 그리고 있으므로 여성영웅소설이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많은 사람이 즐겨 읽지 않았는가 싶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언제 누가 만들었을까?

  우리의 고전소설 가운데 작자가 알려진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소설이 작자가 누구인지, 따라서 언제 지어졌는지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소설의 내용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박씨전]도 언제 누가 지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소설 후반부는 병자호란으로 인한 사건 전개를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가공의 요소가 적절하게 섞여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인조, 이시백, 임경업, 김자점, 그리고 오랑캐 장수 용골대 등 병자호란 때 활약했던 실제 인물과 박씨라는 가공의 여성 인물이 같이 등장하면서 실존 인물보다 허구의 인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남성이 아닌 여성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 주체로 등장하고 있어 더욱 흥미를 끈다.

  아무튼 역사적 사건인 병자호란을 제재로 삼고 있으므로 이 소설은 병자호란이 끝난 후, 적어도 17세기 후반에는 지어졌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조선 시대에는 두 번의 큰 전쟁이 있었는데, 바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다. 전쟁으로 인해 조선이 입은 피해는 실로 막대하였다. 이 중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았으나 조선인이 당한 치욕과 울분은 임진왜란 때보다 더 심했다. 역사책에는 청나라 태종이 1636년(병자년)에 친히 1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 것으로 병자호란이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나라 군대는 12월 1일 집결하여 12월 2일 중국 심양을 출발하였다. 이때 선봉에 선 장수는 마부태와 용골대이다. 이들은 의주부윤으로 있던 임경업이 백마산성을 굳게 수비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피하여 밤낮으로 달려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도달하였다. 조정에서는 뒤늦게 청나라의 침입을 알아차리고,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인조는 궁궐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갔다.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성 안팎의 연락을 끊어 버렸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1637년 1월 30일까지 45일간 항전하다가 결국 청나라 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항복을 했다. 인조는 열 가지가 넘는 조항으로 충성을 다짐하고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삼전동)에 나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 의식을 청나라 태종에게 하고나서야 전쟁이 끝났다.

  인조가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끝났으나 이 전쟁은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전쟁 직후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형제를 비롯한 수많은 부녀자가 청나라로 끌려갔고, 해마다 청나라에 공물을 바쳐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후 청나라와의 관계는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에 대한 반대 감정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청나라에 잡혀갔던 봉림대군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등극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효종이다.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청을 물리쳐야 된다는 이른바 ‘북벌론’을 내세웠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은 이렇게 해서 깊어져 갔다.

  [박씨전] 후반부의 주요 내용은 병자호란의 진행과 비슷하게 전개된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서는 병자호란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보자. 오랑캐가 임경업을 피해 다른 길로 조선을 침략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간다. 남한산성에서 저항하다가 급기야 항복을 하고 만다. 세자와 대군, 그리고 여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간다. 이 소설의 후반부에 그려진 이러한 사건은 실제 역사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 동시에 실존인물 이시백과 임경업이 등장하는 점, 박씨가 왕명을 어길 수 없다면서 적군을 놓아주는 장면, 여성이어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하여 분함을 삭인다는 장면에서도 역사적 사실성은 드러나고 있다. 특히 청나라로 끌려가는 부인들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장면은 비참한 역사 그대로이다. 이 점에서 [박씨전]을 역사소설이라고 한다.

  하지만 소설 속에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 다른 장면이 등장한다. 오랑캐 왕이 조선을 침략하려 하지만 신인, 즉 박씨가 무서워 함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장면, 자객 기홍대를 보냈으나 박씨에게 혼이 나 쫓겨나는 장면, 박씨가 오랑캐 장수 용골대를 죽이고 그 형 용울대를 혼내주는 장면이나 임경업이 돌아가는 오랑캐 군대를 혼내주는 장면 등은 실제 역사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부분이다. 병자호란은 우리나라에 큰 손해를 끼쳤으며 당시 민중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다. 오랑캐라고 경멸하던 청나라에 패배한 만큼 민중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박씨를 등장시켜 오랑캐를 혼내는 장면은 현실적인 패배와 고통을 상상 속에서 복수하고자 하는 민중의 심리 욕구가 표현된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역사 속의 병자호란은 조선이 완전히 패배한 전쟁이었다. 임금이 청나라 왕에게 항복을 했던 치욕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박씨의 활약으로 부분적인 승리를 이끌어 낸다. 이런 소설을 두고 '정신적 승리'의 문학이라고도 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패배한 것을 허구 공간인 소설에서나마 승리하도록 꾸몄다는 말이다. 청나라에 당한 조선의 치욕을 그런 방법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계속)


신동흔 2011.07.21. 11:01 am 

장경남 선생님의 고전소설산책 즐거운 장정이 시작됐군요.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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