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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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성전(2) : 하층 '민'의 가능성과 저력

김현양

 채봉과 혼인하지 못하고 이승상의 집을 떠나야 했던 미천한 인물 소대성은 어떻게 성공하게 되었을까요? 소대성의 성공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또 하나의 논쟁을 살펴보겠습니다.


북흉노: 나는 북방 요호국 응천땅 왕이라. 명을 하늘께 받아 대병(大兵)을 거느려 명나라를 멸하고 천하 강산을 건져내려 하거늘, 너희는 어떠한 기병(起兵)이건대 천의(天意)를 알지 못하고 감히 항거하는다.

서경태: 무지한 오랑캐야 입을 열어 무슨 말 하느냐. 하늘이 두렵지도 아니하냐. 천지신명(天地神明)하여 너의 반(反)하는 줄 알으시고 나를 명하사 너희 등을 소멸케 하실새 대군을 들어 이에 왔느니, 네 만일 천의를 순종하면 죄를 용서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서북 오랑캐를 다 함몰(陷沒)하고 네 머리를 베어 천자께 바치리라.


북흉노의 왕과 명나라 장수 서경태와의 설전입니다. 북흉노는 중원(中原)을 차지하고자 명나라를 침략하고, 자신의 기병을 하늘의 뜻이라 강변합니다. 북흉노의 침략에 맞서 이를 패퇴시키고자 하는 서경태 역시 자신의 임무가 천의(天意)임을 주장하며 북흉노를 질책합니다. 적대하는 두 세력이 천의를 내세우며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의를 동아시아 국가적 질서의 이상이라고 할 때, 중국이나 중국을 침입한 외적이나 공히 자신들의 패권 차지가 동아시아 국가질서의 이상을 수립하는 것임을 확언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태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명대에서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이 읽혀지던 조선조 후기에서 보더라도 동아시아 국가질서의 이상은 중국을 정점으로 하여 변방의 오랑캐들이 수직적으로 질서화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이 중국을 침입하고 자신들의 패권이 동아시아 국가질서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은 문제적 상황임에 분명합니다. 소대성의 성공은 바로 이러한 문제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소대성전>에서는 북흉노의 침입에 의해 야기되는 중국과 외적의 대립이 매우 첨예하게 형상화 되어 있습니다. 황제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친히 출전해야 할 만큼 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황제가 외적에게 항복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처하게 됩니다.


호왕이 달려와 삼장과 군사를 다 죽이고 명제는 함정(陷穽)에 든 범이라. 어찌 망극지 아니 하리오. 명제 하늘을 우러러 통곡 왈,

“죽기로는 섧지 아니하되 사직이 오늘날 내게 와 망할 줄 알리오. 황천에 들어간들 태종 황제께 하면목(何面目)으로 뵈오리오.”

하시고, 슬피 울으실 때, 호왕이 황제 탄 말을 질러 꺼꾸러 치니 상이 땅에 떨어지거늘, 호왕이 창으로 상의 가슴을 겨누며 꾸짖어 왈,

“죽기를 설워하거던 항서(降書)를 써 올리라.”

상이 총망 중에 대답하시되,

“지필(紙筆)이 없으니 무엇으로 항서를 쓰리오.”

호왕이 크게 소리하여 왈,

“목숨을 아낄진대 용포(龍袍)를 떼고 손가락을 깨물라.”

하니 차마 아파 못할네라. 소리 나는 줄 모르고 통곡하시니, 용의 울음소리 구천에 사무치는지라. 하늘이 어찌 무심하리오.


이처럼 <소대성전>에서는 외적의 침입에 의해 야기된 위기가 매우 심각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와중에 이를 타개하고 황제를 구원하여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국가체제를 수호하는 자가 바로 소대성이었으니, 소대성은 이로 인해 노국의 왕이 되었으며, 이것이 그의 성공의 종착점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소대성의 성공은 미리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천하다는 이유로 채봉과의 혼인을 이루지 못하고 이승상의 집을 떠난 소대성은 청의동자의 계시로 청룡사 노승(老僧)을 찾아가 산중에서 병서를 공부하며 지낼 수 있었으며, 청룡사 노승, 죽은 이승상, 옥포산 선관 등의 도움으로 신물(神物)을 얻고, 곤경에서 벗어나 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옥포산 선관의 경우에는 죽음의 순간에 소대성을 구원했으니, 이러한 인물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소대성의 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노왕이 된 후 소대성은 채봉을 다시 찾아가 혼인하게 됩니다. 이로써 소대성이 성공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두 개의 논쟁은 종결되었습니다. 미천한 인물 소대성의 성공은 미래적 가능성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국가체제가 고수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소대성의 성공은 천상의 뜻을 대행하는 여러 인물들의 도움을 통해 가능하게 된 것이었으니, 하늘의 뜻이 무엇인가도 분명해 졌습니다.

하지만 논쟁이 종결되고 사태가 분명하게 된 이 지점에서 다시금 ‘하늘은 왜 미천한 인물인 소대성으로 하여금 하늘의 뜻을 실현하도록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대성전>은 독자에게 소대성과 채봉의 혼인과 북흉노와 명나라의 군사적 대결의 추이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서사적 관심을 집중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 서사적 관심의 최종 귀결은 거지 소대성이 지체 높고 아름다운 규수를 차지하고 세계를 평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대성전>은 독자에게 끊임없이 소대성을 동정하고 지지하도록 유도하고 있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고 생각하면 이는 매우 불합리한 것입니다. 작품이 소통되는 당대의 현실적 맥락에서 본다면 소대성은 결코 동정받거나 지지될 수 없는 미천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거지에게서 지체 높고 아름다운 규수를 차지하고 세계의 질서를 지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금 ‘소대성 낮잠자기’라는 속담을 상기해 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소대성 낮잠자기’라는 속담은 크게 성공할 인물이 때를 만나지 못해 빈둥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사용됩니다.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 같은 인물이 의외의 성취를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이 속담은 우리에게 역설합니다. 이는 소대성의 성취가 의외의 성취라는 의미와도 상통합니다. 세계의 질서를 지탱하는 자는, 그 세계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책무를 스스로 지고 이를 통해 온갖 현실의 기득을 향유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세계의 질서 속에서 소외된 자였습니다. 세계의 질서의 정점에 놓여있는 황제가 유약함과 비굴의 극치를 보여줄 때, 홀연히 소대성은 당당하게 나타납니다. 독자들은 소대성을 통해 상층의 유약함과 비굴함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하층의 당당함에 즐거워합니다. 비록 <소대성전>은 하층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는 못 했지만 하층 '민'의 가능성과 저력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중세적 명분론의 큰 틀을 부수지는 못했지만 상하의 역할과 책무에 대한 작지만 의미 있는 반란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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