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산책

2791

프린트하기

소대성전(1) : 잠꾸러기 거지 영웅의 성공담

김현양

 우리 속담에 ‘소대성 낮잠 자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크게 성공할 인물이 때를 만나지 못해 빈둥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사용되는데, 그렇다면 속담에까지 등장한 소대성이란 인물은 누구일까요? 속담 속의 인물 소대성은 조선 후기,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8세기 중엽 이래 당시의 독자들이 널리 애독했던 소설 <소대성전>의 주인공 소대성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속담으로까지 거론되고 있으니, 그가 주인공인 소설 <소대성전>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대성전>이 당시의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소대성의 성공이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대성이라는 이름이 이미 ‘커다란 성공(大成)’을 나타내고 있는 터이므로, 소대성은 성공하기 위해 태어난 인물이며, 그의 성공은 흥미를 끌만한 어떤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리라는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대성의 성공과 관련하여 무엇보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초라하기 그지없는 거지같은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소대성의 아버지는 병부상서(兵府尙書)를 지내다가 벼슬에 뜻이 없어 낙향(落鄕)한 인물이었다지만, 그의 아들 소대성은 잘난 아버지가 죽은 후 유리걸식하며 품팔이를 하는 신세가 됩니다.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른 후 가산(家産)이 탕진되자 백금 오십 냥만을 들고 집을 나선 소대성은, 구십 노모(老母)의 장례를 치르지 못해 통곡하는 노인에게 가진 돈을 모두 주어버리고는 그야말로 거지 신세가 됩니다. 이 대목에서 화자(話者)는 “이후로 생이 기갈(飢渴)이 자심(慈甚)하여 남의 외양도 쳐주며 담도 쌓아 겨우 연명하여 지내가니, 장대한 기남자(奇男子) 점점 수척(瘦瘠)하여 주린 거지 되었으니 하늘이 어찌 무정하리요.”라며 탄식합니다.

거지 소대성이 거지 신세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이승상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여기서 이승상과 소대성이 만나는 장면을 잠깐 보기로 하지요.


일일은 승상이 술을 취하시고 서안(書案)에 의지하야 잠간 졸더니, 문득 춘풍(春風)이 사람을 인도하야 한곳에 다다르니, 이곳은 승상이 평일(平日)에 유흥(遊興)을 타 고기도 낚으며 풍경(風景)을 구경하는 월영산(月影山) 조대(釣臺)라. 그 위에 상서(祥瑞) 기운이 열렸거늘, 나아가 보니 청룡이 조대에 누었다가 승상을 보고 고개를 들어 소리를 지르고 반공(半空)에 솟거늘, 깨달으니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심신(心身)이 황홀하여 죽장(竹杖)을 짚고 월영산 조대로 나아가니, 나무베는 아이 나무 베어 시내가에 놓고 버들 그늘을 의지하여 잠을 깊이 들었거늘, 보니 의상(衣裳)이 남루(襤褸)하고 머리털이 흩어져 귀밑을 덮었으며 검은 때 줄줄이 흘러 양협(兩頰)에 가득하니, 그 추비(醜鄙)함을 측량(測量)치 못하나, 그 중에 은은한 골격(骨格)이 때 속에 비추었거늘 헤지 아니하시고 무수한 이를 잡아죽이며 잠깨기를 기다리더니, 그 아이 몸을 둘러 누으며 탄식 왈,

“형산백옥(荊山白玉)이 돌 속에 섞였으니 뉘 보배인줄 알아보며, 여상(呂尙)의 자취는 교대(橋臺)에 있건마는 문왕(文王)의 그림자 없고, 와룡(臥龍)은 남양(南陽)에 누었으되 유황숙(劉皇叔)의 자취없으니, 어느 날에 갑자일(甲子日)을 만나리요.”

하며  돌아누으니 그 소리 웅장하여 산천이 울리는지라. 탈속(脫俗)한 기운이 성음(聲音)에 나타나니, 승상 마음에 헤오대,

‘내가 영웅(英雄)을 구하더니 오늘날 만났도다’


이승상은 청룡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꿈을 꾸고는 그 곳으로 찾아가 잠자고 있는 소대성을 발견합니다. 남루한 옷에 머리털은 풀어 헤치고 두 뺨으로 때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소대성의 몰골은 그야말로 거지 행색 그대로입니다. 아무리 청룡이 하늘로 솟구치는 꿈을 꾸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소대성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승상은 그 볼 것 없는 몰골 밑에 감추어져 있는 소대성의 진면목을 예감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 소대성을 자신의 딸 채봉과 혼인시키고자 한다.

그렇지만 소대성의 진면목을 지인지감(知人知鑑)이 있는 이승상 이외에 누가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소대성과 채봉의 혼사를 둘러싸고 이승상과 그의 처 왕부인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왕부인: (감히 말리지 못하고 눈을 들어 생을 보니 얼굴이 웅장하고 풍도 화려하나 선비의 태는 없는지라). 채봉은 연연약질이라 저와 같은 아름다운 재사를 얻어 슬하에 즐거움을 볼렸더니 소생은 내 뜻과 불과하니 가탄이로다.

이승상: 부인 말씀이 어찌 이렇듯 무식하뇨. 자로로 명인군자 때를 만나지 못하면 초야에 묻혀 남이 알가 숨기나니 소생은 명가 자손이라 또 흉중에 만고흥망을 품었으니 불구에 이름이 천하에 진동할 것이니 우선 미천함을 혐의하야 이런 군자를 버리리요. 부인이 오늘은 멀리 여기나 후일에 공경할 것이니 내말을 허도이 여기지 말으소서.


자신의 소중한 딸을 아름다운 재사(才士)에게 혼인시켜 즐거움을 보고자 하는 왕부인의 마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왕부인의 눈에는 이승상이 말하는 미래의 가능성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남편의 말에 따라야 하는 것이 도리인지라 왕부인은 이승상에게 자신의 뜻을 굽힙니다. 하지만 이승상이 소대성과 채봉의 혼인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죽자 왕부인은 다시 자신의 뜻을 내세우고, 혼사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다시 재연됩니다.


채  봉: 듣자오니 소생(蘇生)이 서당을 떠났다 하오니 거거에게 응당 하직(下直)이 있을 것이니 무슨 연고(緣故)로 나갔나니까?

왕부인: 너는 규중처자(閨中處子)라. 외객(外客)의 유무(有無)를 알아 무엇하리오.

채  봉: 소녀 소생의 거처를 묻자옴이 여자의 행(行)이 아니라 하오니, 전일(前日) 중헌(中軒)에서 무슨 증간(證干)하였느니까? 여도(女道) 정열(貞烈)은 여자의 떳떳한 일이오니, 소생의 거처를 묻자왔나니다.

왕부인:그 러면 소생을 위하야 수절(守節)코저 하느냐. 범간(凡間) 수절이 곡절(曲折)이 있나니라. 승상이 취중(醉中)에 잠깐 언약한 오륙년의 육례(六禮)를 갖추어, 동상(東床)의 예를 이루지 아니 하였으니, 소생은 곧 남이라. 더러운 말로 가문을 욕되게 말라.

채  봉: 야야(爺爺) 분명히 중헌에서 양인(兩人)의 예를 이루고 시문(詩文)을 창화(唱和)하였으니 이미 삼종지의(三從之義) 이뤘는지라. 그때에 모친께옵서 증참(證參)하신 일이어늘, 이제 소녀의 절행(節行)이 아니라 하며 가문의 욕된다 하옵시니, 옛날 초왕(楚王)이 오셔서 여아(女兒)를 데리고 희롱하시되, 이 아이 자라거든 문밖 백성의 며느리를 주리라 하시더니, 공주 장성하사 부마(駙馬)를 간택(揀擇)하실 때, 공주 여쭈오대. 신첩(臣妾)이 오세에 부왕(父王)이 문밖 백성의 며느리 주시마 하시매 백성의 거주(居住)받듦을 주야 명념(銘念)하여삽더니 이제 들으매 다른 데 부마를 간택하시니, 신첩은 다른데 아니 가옵고 백성의 며느리 되기를 죽기로써 간(諫)한대, 초왕이 그 명령을 자책(自責)하시고 인하야 백성으로 부마를 정하였으니, 지금 천추(千秋)의 그 절행을 욕된단 말이 없는지라, 소녀의 연광(年光)이 십삼세라, 어찌 오세 소아(小兒)만 못하오리까.

왕부인: 내 뜻을 거스리니 금일부터 모녀지정(母女之情)을 끊으리라.


채봉은 왕부인이 자객을 시켜 소대성을 죽이고자 하여 소대성이 집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는 왕부인에게 격렬히 항의합니다. 소대성과의 혼약을 지켜야 한다는 채봉과 소대성과의 혼약은 취중 언약에 불과하니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왕부인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긴장이 조성됩니다. 채봉은 도리(道理)를 내세우나, 왕부인의 논리 또한 도리에서 그리 벗어난 것은 아니니, 이 쟁점은 단순한 도리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 논쟁의 핵심은, 너무나 뻔히 알 수 있듯이, 왕부인의 ‘현실성’과 채봉(이승상)의 ‘가능성’ 사이의 대립입니다. 소대성의 현재적 미천함은 결국 사위삼기를 원치 않는 왕부인에게 거절의 근거였던 바, 소대성은 ‘大成’의 과정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던 것입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27 조선조 연행사의 ‘천주당’ 견문기(2)
2012.06.14. 1325
26 조선조 연행사의 ‘천주당’ 견문기(1) [1]
2012.06.07. 1381
25 가부장권의 상실과 회복의 서사 : <이춘풍전>(2)
2011.08.26. 1849
24 가부장권의 상실과 회복의 서사 : <이춘풍전>(1)
2011.08.18. 1756
23 국가의 위기를 극복한 민족적 영웅 이야기 : [임진록](2)
2011.08.11. 1746
22 국가의 위기를 극복한 민족적 영웅 이야기 : [임진록](1)
2011.08.04. 1959
21 병자호란의 치욕, 허구적 상상으로 극복한 [박씨전](2)
2011.07.28. 2080
20 병자호란의 치욕, 허구적 상상으로 극복한 [박씨전](1) [1]
2011.07.21. 2592
19 수성지(2) : 정의로운 역사를 위하여
2011.01.05. 2100
18 수성지(1) : 역사에 천도가 있는가?
2010.12.21. 2411
17 소대성전(2) : 하층 '민'의 가능성과 저력
2010.12.08. 2353
소대성전(1) : 잠꾸러기 거지 영웅의 성공담
2010.12.01. 2792
15 조웅전(2) : 유교적 이념의 복원 혹은 해체의 징후
2010.11.17. 2264
14 조웅전(1) : 조선 후기 최고(?)의 인기 소설
2010.11.10. 2639
13 유충렬전(2) : 고난 그리고 가족애 [1]
2010.11.03. 2376


1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