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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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웅전(2) : 유교적 이념의 복원 혹은 해체의 징후

김현양

    두 개의 ‘악의 축’ 가운데 <조웅전>에서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내고자 한 것은 황제에 의해 구축된 세계 질서를 붕괴시키는 ‘역신’의 문제입니다. <조웅전>은 작품의 서두에서부터 군담소설의 상투적인 출생담을 생략한 채 급박하게 역신의 문제를 제기하며 위기를 조성합니다. 과거회상체로 조웅의 아버지인 충신 조정인의 자살 사건을 서술하더니, 궁궐에 침입하여 궁녀를 물고 달아난 백호(白虎)의 출현을 불길한 어조로 알립니다. 그리고는 황제가 갑자기 죽고 이두병이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태자는 귀양가고, 백성들은 이두병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에 이리저리 피난길에 오릅니다. 급작스럽게 닥친 권력의 교체와 이로 인한 동요가 시작부터 실감나게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충신 조정인의 자살은 너무나 급작스러운 것이어서 얼핏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난리를 평정한 공으로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충신 조정인이 무엇 때문에 자살하게 됐을까요? 작품에서는 단지 “간신인 우승상 이두병이 조승상을 시기하여 황제에게 거짓 죄를 아뢰자” 독약을 먹고 자살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을 뿐,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다른 서사적 정보는 아무 것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 죽음의 정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정인이 자살하게 된 것은 이두병이 황제에게 거짓 죄를 아뢰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황제가 조정인을 신임하고 있던 터이므로, 이러한 이두병의 참소는 황제에 의해 명석하게 거짓으로 가려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정인은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황제에 의해 참과 거짓이 가려질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된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참과 거짓이 가려진다 해도 이두병을 벌하기 어려운 상황, 조정인이 자신에게 가해진 모함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 조성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황제의 권력이 무력화된 상황이 조성되었음을 간접적으로, 하지만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 없이 태어난 유복자 조웅은 황제의 권력이 무력화된 상황, 세계의 중심이 사라져 버린 시대의 불행을 홀로 감당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조웅이 태생적으로 세계의 거짓 중심인 이두병과 대립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조웅전>은 이두병과 조웅의 기나긴 싸움의 과정을 중심적으로 그려내면서 역신으로 인해 붕괴된 세계 질서가 이 어린 소년에 의해 어떻게 복구되는가를 자세하게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조웅은 역신 이두병에 의해 붕괴된 세계의 질서를 어떻게 복구했을까요?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조웅이 세계의 질서를 복구할 수 있었던 것은 천명(天命), 즉 하늘의 명령에 의해서였습니다. 조웅이 그에게 닥쳤던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고 이두병에게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승리가 하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황제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자신이 정당하다는 뚜렷한 소신을 지니고 있는 조웅은, 어리지만 똑똑하고 의지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두병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도망하는 어린 조웅은 사실 힘없고 나약한 어린 아이일 뿐입니다. 산중에서 갈 곳 몰라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통곡하고, 봇짐을 빼앗아간 도적에게 아버지의 화상을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조웅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어머니의 머리를 깍으며 흘리는 조웅의 눈물은 부당한 세계에 저항할 수 없는 조웅의 무능을 드러내는 상징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두병에게 쫓기는 어린 조웅의 형상을 이처럼 사실적으로 나약하게 그렸기에 <조웅전>은 다른 어느 군담소설 작품보다도 위기감을 실감나게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모욕감, 배고픔, 두려움 등 자신을 보호해 줄 세계의 질서가 붕괴된 상황에서 경험하게 될 위기의 심리적 감정을 독자들은 위기에 처한 조웅 모자를 통해 실감하게 되며, 이것 또한 <조웅전>이 인기를 얻은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약한 조웅은 ‘악의 축’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조웅의 스승인 천관도사가 하늘의 별을 보며 예언했듯이, 하늘은 조웅에게 ‘악의 축’을 제거할 것을 명했으며, 그에게 영웅의 능력을 부여했습니다. 그렇다면 악의 축을 제거하고 지상의 질서를 복구하라는 하늘의 명령은 어떻게 구현 되었을까요? 하늘은 어떻게 조웅에게 영웅적 능력을 부여했을까요?

    조웅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에 의해 글, 병법, 무술, 도술, 말, 갑옷, 칼, 예지력 등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웅 모자를 구원해 준 월경대사는 조웅에게 글과 술법을 가르쳤습니다. 조웅의 실질적 스승인 천관도사는 병법과 무술, 도술을 가르쳤으며 천하 명마를 주었습니다. 죽은 귀신인 황달 장군은 갑옷을 주었으며, 화산도사는 천하 명검인 삼척검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아버지 조정인과 송 황제는 꿈 속 계시를 통해 조웅에게 예지력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불교(월경대사), 도교(천관도사, 화산도사), 귀신숭배(황달 장군, 조정인, 송 황제)의 관념을 표상하는 인물로, 하늘의 명령을 대신하는 대리적 인물, 즉 천상적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상적 인물의 도움으로 영웅은 탄생하고 지상의 질서는 복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거꾸로 반추해 본다면 천상적 인물의 도움이 없었다면 영웅은 탄생하지 않았고 지상의 질서는 복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지상의 질서는 하늘의 명령으로 복구되었으며, 그 질서란 바로 ‘중국’과 ‘황제’를 중심으로 한 세계의 질서, 즉 ‘구체제’인 것입니다. ‘중국’과 ‘황제’를 질서의 중심에 놓는 구체제의 세계 인식, 그것은 철저한 유교적 세계 인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교적 세계 질서를 지상에 구현하고자 하는 방법은 불교, 도교, 귀신숭배 등 반유교적 혹은 비유교적인 낭만적 상상의 관념이란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세계를 중심과 주변으로 수직적으로 차별화하고, 이 수직적 차별화를 통해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고자 했던 유교의 이념은 당위적으로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지만, 이러한 유교적 이념을 지상에 구현하는 방법은 철저하게 반유교적 혹은 비유교적인 낭만적 관념이었던 것입니다. 조웅의 영웅적 활약에 의해 지상에 구체제가 복원되었지만, 그 복원은 역설적으로 유교적 이념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것, 즉 유교적 이념의 해체 혹은 종언의 징후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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