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박진영의 번역가열전

1539

프린트하기

[1] 최초의 전문 번역가 홍난파

문자 수선공





아마도 1924년 2월 5일이나 6일쯤으로 추정되는 날, 몇몇 문인이 모인 사랑방에서는 설 세배상이 금세 술상이 되고 막 윷놀이 판이 벌어질 참이었습니다. 그때 깐죽거리기로 유명한 시인이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괜한 트집을 걸었습니다. 

 

음악이나 하려면 제대로 할 것이지 주제넘게 소설이 다 뭐냐는 것....... 동서고금에 두 가지 예술에 모두 대성한 천재가 있더냐는 일갈이었습니다. 시비를 건 쪽에서는 괜히 핏대를 올렸고, 얼결에 휘청한 음악가 겸 소설가도 사내자식 체면에 고분고분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둘 다 스물일고여덟의 청춘이었으니까요.

 

왜 없니?”

누구?”

바그너도 모르니? 시인이요 음악가인 바그너 말이다.”

장하다! 그래, 네가 그런 불출세의 대천재란 말이지?”

여기에는 나로서도 유구무언일밖에.

 

그날 밤 분김과 부끄럼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음악가 겸 소설가는 새벽 일찌거니 이부자리를 박차고 나와서는 막 출판사에 넘기려던 창작집 원고 한 뭉치를 아궁이에 처넣었습니다. 그러고는 원고지의 마지막 한 장이 잿더미가 될 때까지 아궁이를 노려보았더랬습니다. 그날부터 음악가 겸 소설가는 그냥 음악가만 되기로 했고 금세 아주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술김에 일격을 날린 시인에게 은근히 감사하면서 말이죠.

 

자기도 모르는 새에 문학청년 하나를 구원해 낸 시인은 이태 전에 <논개>를 발표한 수주 변영로입니다. 그리고 변영로와 마주칠 때마다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던 음악가 겸 소설가가 바로 난파 홍영후, 홍난파입니다.

 

●     ●     ●     ●    

  

홍난파가 소설가였던 시절은 1921년에서 1924년까지 고작해야 사 년 정도, 아무리 길게 잡아도 일본 유학 시절에 <삼광>을 발행한 때부터 칠 년 남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1919년 2월에 문학, 음악, 미술을 아우르노라며 야심만만하게 이름을 붙인 동인지 <삼광>은 김동인의 <창조>보다 겨우 아흐레 뒤져 창간되었습니다. <삼광>은 겉으로는 세 가지 빛을 좇겠노라 했지만 실상 음악은 홍난파 혼자 떠맡았고 미술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문학은 홍난파, 황석우, 유지영, 염상섭이 글을 내놓았으니 사실상 문학 동인지나 문예 전문지라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음악 평론은 물론 시, 소설, 희곡, 수필, 비평, 번역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았으니까요.

 

바로 그 <삼광> 창간호에 홍난파가 번역해 내놓은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홍난파의 번역은 3회 동안 분재되다가 중단되었지만 1923년 6월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1934년 11월에 출판사는 바꾸어 재출간되기도 했습니다. 그새 표제도 여러 번 바뀌긴 했습니다. 어쨌거나 《가난한 사람들》은 도스토옙스키의 등단작이기도 하고 홍난파의 등단작이기도 한 셈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도스토옙스키 소설이자 식민지 시기를 도틀어 유일무이한 도스토옙스키 번역이기도 합니다.

 

●     ●     ●     ●    

 

홍난파가 본격적인 문학 활동에 나선 것은 1921년 무렵의 일입니다. 사실 그전에도 홍난파는 내로라하는 음악가이자 일본 유학생계에서 배출된 최대의 스타 저술가였습니다. 열여덟 살 때인 1916년부터 문학을 배신한 1924년까지만 해도 무려 13종 15권의 창가집과 음악 논저를 출간했으니 말입니다. 그사이에 ‘재동경 조선 유학생 악우회’를 꾸려서 예술 종합 잡지이자 문학 동인지 <삼광>을 창간했고요. 그리고 일본 유학 직후인 1921년부터 분서 사건이 일어난 1924년 사이에 스무 권의 책을 더 펴냈습니다.

 

놀랍게도 홍난파는 그중 몇 권의 앞머리나 광고면에 자신의 책 목록을 늘어놓았습니다. 위에 있는 사진이 바로 홍난파가 광고한 자신의 저술 목록입니다. 한국의 근대 문학사를 도틀어 자기 저술의 목록을 이처럼 당당히 내밀 수 있는 작가가 또 있었던가요? 서른 살도 되기 전에 스무 권도 넘는 저작 목록을 가진 작가가 있었던가요? 그것도 음악, 창작, 번역을 분류해서 펼칠 수 있는 작가 말입니다.

 

●     ●     ●     ●    

 

먼저 창작 목록을 볼까요? <매일신보>에 연재했다가 단행본으로 펴낸 소설이 두 편이 있습니다. 홍난파는 창작이라고 우겼지만 실제로는 일본 소설을 번안한 작품이죠. 세련된 고급 장정의 창작집 《향일초》는 제가 알기로는 한국의 근대 문학사에서 현진건의 작품집에 이어 두 번째로 상재된 단편 소설집입니다. 그런데 홍난파는 《향일초》를 제이 창작집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광고에 의하면 홍난파는 제일 창작집부터 제사 창작집까지 네 권의 단편 소설집을 거의 동시에 냈습니다. 그 밖에도 두 권의 창작집이 더 있는데 그중 한 권이 바로 변영로의 일갈 탓에 아궁이 속에서 운명을 달리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장편, 단편의 소설이 모두 여덟 권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실제로 출판된 것은 신문 연재소설을 손봐서 펴낸 두 권과 제이 창작집 《향일초》뿐입니다. 나머지 다섯 권은 실제로는 출간되지 않았거나 또는 출간되지 못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홍난파는 문학청년의 길을 버리고 결연히 음악가의 길로 매진하겠노라 다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습니다. 출판사에 막 넘기려던 원고까지 불태우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한 뭉치는 분명히 이튿날 아침에 태웠지만 나머지 네 뭉치를 몽땅 태웠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네 뭉치 중에서 적어도 두 뭉치는 지금도 남아 있거든요. 

 

●     ●     ●     ●    

  

그건 그렇다 치고 이번에는 번역을 볼까요? 번역서 목록은 한결 더 화려합니다. 모두 12권에 달하는 번역서 제목을 볼라치면 도스토옙스키 말고도 투르게네프, 시엔키에비치, 빅토르 위고, 알프레드 드 뮈세, 헤르만 주더만, 에밀 졸라...... 19세기 중후반 꼭 60년의 유럽 문학에 집중된 번역서 목록은 가히 당대 최고의 세계 문학 컬렉션이라 할 만합니다. 작가 수준도 그렇고 작품을 고른 안목도 그렇습니다.

 

아, 스마일스의 이름도 눈에 띄는군요. 그뿐이 아닙니다. 실제로 출판되지는 못했지만 단편집 한 권과 희곡집 한 권도 마무리 단계까지 육박한 참이었습니다. 그중 한 권의 원고 역시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결코 허튼소리가 아니올시다.

 

●     ●     ●     ●    

 

불과 삼 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쌓아 올린 목록이 이러할진대 홍난파야말로 바그너 뺨 치는 음악가 겸 소설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적어도 홍난파는 삼일 운동 직후에 등장한 손꼽히는 단편 작가임이 틀림없습니다. 막상 창작집 《향일초》의 실상이라는 게 문학청년의 습작 수준에 머물렀거나 별 볼 일 없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또 일찍이 최남선이 <창조>에 빅토르 위고, 톨스토이, 밀턴, 세르반테스, 초서를 아주 간략히 소개한 이래 처음으로 세계 문학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보여 준 번역가가 바로 홍난파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최남선은 번역가라기보다는 최초의 편집자 겸 기획자라 보아야 마땅하겠지요. 홍난파는 삼일 운동 직후에 출현한 최초의 전문 번역가이자 식민지 시기 최대 규모의 번역가입니다. 그러고 보면 홍난파가 도쿄의 하숙집에서 도스토옙스키를 번역하는 모습이야말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번역가가 탄생하는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     ●     ●     ●    

 

다시 1924년 정월 초이튿날 새벽 홍난파의 집 아궁이에서 불타 버린 원고를 생각해 봅니다. 홍난파가 회고한 분서 장면은 한국에서 처음 등장한 세계 문학 번역가이자 문학청년이 문학의 꿈을 접는 바로 그 순간을 그린 셈입니다. 안타깝게도 번역가의 꿈, 문학청년의 꿈은 너무 일찍 불타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홍난파가 곧바로 절필이라도 한 건 아닙니다. 홍난파는 음악가의 길을 걸으면서도 줄곧 글을 썼고 책을 엮었으니까요. 분서는 분서고 절필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또 홍난파의 분서를 곧이곧대로 변영로의 술주정 탓으로 돌려서도 안 됩니다. 음악에 대한 홍난파의 열정으로만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어쨌거나 홍난파는 원고 모두를 불태운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머지 몇 뭉치의 원고를 두고두고 소중히 간직했다가 물려주었을 정도니까요.

  

그렇다면 홍난파는 대체 왜 번역가로 사는 일을 그만두었을까요? 홍난파는 어째서 문학의 길을 저버렸을까요? 우리는 식민지 한국에서 갓 탄생한 전문 번역가의 때이른 좌절, 나아가 번역의 비극적인 운명을 묻고 있는 겁니다.

 

 

■ 인용문: 홍난파, <분서의 이유>, 《박문》 8호, 박문서관, 1939.6, 7~9면.

■ 이미지(위): 안석영(석주 안석영)의 캐리커처, <조선일보>, 1931.2.19, 4면.

■ 이미지(아래, 왼쪽): 홍난파, 《청년 입지 편》, 박문서관, 1923.3.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자료 사본.

■ 이미지(아래, 오른쪽): 홍난파, 《매국노의 자(子)》, 회동서관, 1923.1.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자료 사본.

 

 

 

 


신동흔 2012.06.03. 10:20 am 

제가 첫 조회에 첫 댓글이네요.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홍난파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어요. 그나저나 조만간 소설에 손을 대볼까 했는데 그냥 생각을 접고 공부나 해야 하는 걸까요? 잠깐 고민... 뭐 일단 해보고 여의치 않으면 불태워버리지요 뭐.ㅎㅎ 건필 기원합니다.

문자 수선공 2012.06.04. 1:05 am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 소설을 쓰신다면 기대 만발입니다. ^^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1] 최초의 전문 번역가 홍난파 [2]
2012.06.03. 1540
3 ‘번역가 열전’을 시작하며 (2) [2]
2012.05.27. 1535
2 ‘번역가 열전’을 시작하며 (1)
2012.05.27. 1230
1 박진영의 번역가 열전 입니다.
2012.05.17. 1224


1 / 2 / 3 / 4 / 5 /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