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박진영의 번역가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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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열전’을 시작하며 (1)

문자 수선공

번역가라는 사람

 

번역가라고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번역만으로 먹고산 사람은 없을 테고, 번역가입네 하면서 자랑스레 명함을 돌린 이도 많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번역가라는 이름으로 문학사에 기억된 적은 없으며, 교실에서 번역가의 이름으로 불려 본 적도 물론 없습니다.

 

번역이 좋아서, 번역에 사명감을 갖고 매달린 사람도 있지만 심심파적이나 한때의 희롱거리로, 끽해야 문학청년의 꿈을 키우기 위해 잠깐 한눈판 사람이 훨씬 더 많지요. 오로지 입에 풀칠하느라 어쩔 수 없이 번역을 떠맡았노라는 사람도 하나둘이 아닙니다. 어쩌면 첩을 갈아 치우거나 오입질하는 기분이라며 너스레 떤 사람도 있었을 법하지요? 그런 사람들을 도틀어 번역가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번역가 열전은 번역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 어렵습니다. 번역가의 탄생에서 시작해 성장과 원숙에 이르는, 잘 짜여진 일대기를 상상하는 것도 곤란한 일입니다. 다만 문학 바깥의 문학, 그저 한 수 아래의 문학에 손댄 사람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왜 하필 

 

번역이 아니고 번역가냐고요? 갑자기 이런 게 궁금해져서요.

 

한국 문학은 세계 문학일까요? 아마 조금은 그렇겠지요. 그럼 세계 문학은 한국 문학일까요? 더 어려운 물음입니다. 왜일까요?

 

한국 문학도 그 자체로 세계 문학일 수야 없겠지만 세계 문학 역시 저절로 한국 문학이 될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앞의 문제야 오래전부터 숱하게 이야기해 온 것이니까 그렇다 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뒤의 문제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세계 문학이 한국 문학의 일부가 되거나 한국 문학의 밑감이 되기 위해서는 번역이 꼭 필요하니까요. 누군가가 한국어로 번역하고 한국에서 출판되어 한국인이 읽을 수 있어야만 되니까요꼭 한국어로 말입니다

 

예컨대 지금 우리 시대에 폴란드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라든가 알바니아의 이스마일 카다레, 또는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반장, 혹은 소년 탐정 긴다이치 하지메(金田一)는 엄연한 세계 문학이거나 세계 문학의 주인공입니다. 반면에 발자크의 인간 희극이나 에밀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는 결코 세계 문학이 아닙니다. 한국인이 한국에서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문학이 아니라면 세계 문학이 될 수 없는 게 마땅한 이치 아닐까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의 세계 문학이라는 관념을 만들어 낸 주역, 그 누군가가 바로 번역가일 터입니다. 십상 낯설고 새로운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져든 사람들이지요.

 

그런 의미의 번역가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고작해야 90년 전쯤의 일입니다. 단지 낯선 나라의 언어,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 문학이라는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다는 생각은 삼일 운동 직후에야 비로소 탄생했습니다.

 

한국인을 포함한 인류가 공유함 직한 문화유산을 한국어로 번역해 내거나 앤솔러지로 펴내는 시대, 저는 그것을 세계 문학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대체 누가

 

그런 번역가란 말입니까? 당장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면......? 글쎄요, 그런 사람이 과연 있나 싶기도 한 게 솔직한 마음이죠. 그래 놓고는 ‘열전’이라고 제목을 붙여 놨으니 저도 이만저만 애가 타는 게 아닙니다.

 

첫머리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번역을 필생의 업으로 삼은 이를 꼽자면 ‘열’전이 될 리가 없고, 번역을 외도 삼은 작가를 들추자니 열‘전’이 되기는 어렵지 않겠나 싶어 그렇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번역가라는 사람은 생애나 행적을 알 길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잘 알려진 작가라 해도 연보나 작품 목록에 번역 작품을 넣는 일조차 무척 드뭅니다. 이런저런 전집이나 선집에서 번역 작품이 한자리를 꿰차 보는 일이야 꿈도 못 꿀 일이죠. 한국 근대 문학사 연구의 실상이 그렇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누구의 이야기부터 어떻게 풀어 나가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순서도 우왕좌왕할 테고 분량도 들쑥날쑥할 게 틀림없습니다. 좋은 번역 십 수 편을 내놓은 전문 번역가부터 졸역 한두 편 들이밀다 사라진 필명, 익명의 번역가까지 뒤섞일지도 모릅니다. 번역가 얘기를 하겠노라 해 놓고 숨은 뒷이야기로 그치거나 엉뚱한 자료 얘기에서 맴돌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제 불평이나 불만만 잔뜩 늘어놓고 말 때도 있을 터입니다.

 

그러니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그래야 일요일 아침의 문학 이야기로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변명 삼아 말입니다. 그나마 이렇게 요일을 떡하니 정해 놓고 글을 쓰는 일에 익숙지 않다 보니 약속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 여간 걱정이 아닙니다. 많이 응원해 주시고 도와주시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나게 읽으면서 즐겨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자, 그럼...... 한국에서 세계 문학이라는 것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인이 읽을 수 있게 된 때의 일, 그런 일을 가능하게 만든 주역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지금부터 90년 전쯤...... 로테에게서 알베르트의 권총을 건네받은 베르테르와 헬머와 세 아이를 뒤로 한 채 문을 닫고 나가 버리는 노라를 나란히 떠올릴 수 있는 시대, 파리 한복판에서 동백꽃을 든 마르그리트와 시베리아 벌판의 카추샤에 함께 열광할 수 있는 나날들, 실크해트의 괴도 신사 뤼팽을 기다리고 있는 파란만장한 모험의 끝을 궁금해 하는 동시에 아Q의 마지막 순간 때문에 차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어느 밤의 일 말입니다.

 

   

20125월 27

문자 수선공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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