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 신동흔의 '옛 이야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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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쥐팥쥐론 : 품안의 자식과 내놓은 자식의 엇갈린 운명

신동흔

연구소에서 기획한 구비문학 작품론을 위해 쓴 원고 가운데 하나입니다. 책이 언제나 나올지 모르겠네요. 내용 미리 공유해도 되겠지요? 함께 읽기 위해 쓴 글이니까요! 


전 세계에서 널리 전승되는 민담

 

구비설화, 특히 민담은 인류 보편의 원형적 이야기로서 특징을 지닌다. 비슷한 내용을 가진 이야기가 세계 각지에서 동시에 전승돼온 사례가 많다. 이에 대해서 한곳의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역사적 영향 관계를 상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이질적인 역사와 문화를 지닌 지역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타나는 현상은 이야기의 보편적 원형성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류 공통의 심리와 상상력으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들이 산출됐다는 뜻이다. (C. G. Jung)은 이러한 공통적인 정신적 기반을 인간의 집단 무의식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한국 민담의 세계적 보편성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콩쥐팥쥐>이다. <콩쥐팥쥐><신데렐라>의 놀라운 유사성은 일찍부터 큰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계모에 의한 극심한 자녀 차별도 그렇지만, 잃어버린 신발을 매개로 해서 남녀가 인연을 맺는다는 내용은 일부러 맞춘 것처럼 흡사해서 놀라움을 안겨준다. 해외에서도 이와 같은 유사성에 주목해서 <콩쥐팥쥐> 이야기를 한국판 신데렐라(Korean Cinderella)’로 부르기도 하거니와, 실은 비슷한 이야기가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 또 다른 지역에서도 널리 확인되고 있는 중이다.

<콩쥐 팥쥐>의 어떠한 점이 이와 같은 인류적 보편성으로 연결되는지 궁금증을 갖게 된다. 얼핏 계모의 악행이라는 요소가 도드라져 보이지만, 이는 표면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데렐라나 콩쥐팥쥐 유형의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완악한 계모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그 인물이 실질적으로는 표상하는 것은 친모(親母)라고 하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자식을 미워하고 괴롭히는 나쁜 엄마의 다른 이름이 곧 계모라는 뜻이다. 제 몸으로 낳은 자식을 부모가 미워하는 것은 실제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어쩌면 모든 부모와 자식 사이에 미움이 개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만약 부모가 모든 자식을 똑같이 미워한다면 차라리 문제가 덜할 것이다. 어떤 자식은 사랑하고 어떤 자식은 미워하는 차별이 행해질 때 더 큰 상처와 모순이 생겨나게 된다. <콩쥐팥쥐><신데렐라>의 핵심적인 서사적 화두에 해당한다.

 

콩쥐와 팥쥐, 알려진 사연과 숨은 사연

 

<콩쥐팥쥐>는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다. 전래동화로 빠지지 않는 이야기라서, 누구라도 어릴 적부터 이 이야기를 접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예전부터 구전되어 온 원래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현대판 전래동화가 구비설화 원전을 많이 축약하고 각색한 데 따른 것이다. 특히 콩쥐가 결혼한 다음에 벌어진 이야기가 생략된 경우가 많다.

구비설화 원전을 보면 주인공 자매의 이름부터가 가지각색이다. 콩쥐와 팥쥐가 공식적인 이름처럼 돼있지만, 원전은 이 외에도 콩조시와 팥조시, 콩대기와 팥대기, 콩남과 팥남 등 다양한 이름을 전하고 있다. 1930년대에 평안북도에서 채록한 15편 자료를 종합해서 정리한 임석재는 콩중이와 팍중이를 인물명으로 삼기도 했다. 한편, 여주인공이 만나는 남자의 신분 또한 자료에 따라 다양하다. 원님이나 평양감사라고도 하고 임금이라고도 하며 그냥 선비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주인공 자매를 콩쥐 팥쥐, 남자를 선비로 설정한 권은순 구연 콩쥐 팥쥐를 기본 자료로 해서 내용을 정리한다.

옛날에 콩쥐와 팥쥐가 살았는데, 계모인 팥쥐 엄마가 친딸만 챙기고 콩쥐를 구박했다. 밭을 매러 보내는데 팥쥐한테는 쇠 호미로 모래밭을 매게 하고 콩쥐는 나무호미로 돌밭을 매게 했다. 콩쥐가 밭을 매다가 호미를 부러뜨리고서 울고 있는데 하늘에서 검은 소가 내려와서 사연을 묻더니만 콩쥐한테 냇물에 가서 목욕을 하고 오라고 하고는 그 사이에 밭을 다 갈아주었다. 그리고 콩쥐한테 맛있는 음식을 전해주었다. 콩쥐가 집에 돌아갔더니 팥쥐 모녀가 문을 걸고 자기끼리 밥을 먹은 뒤였다. 팥쥐는 콩쥐가 가져온 음식까지 빼앗아먹었다. 얼마 뒤에 외갓집에서 잔치를 한다고 초청했는데 계모가 팥쥐만 데리고 가면서 콩쥐한테 잔치에 오려면 조와 벼를 석 섬을 쪄놓고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우고 구멍난 솥에 밥을 해놓으라고 했다. 콩쥐가 울고 있을 때 두꺼비가 와서 솥의 밑구멍을 막아줘서 밥을 할 수 있게 하고, 구렁이가 독을 막아줘서 물을 채울 수 있게 하고 새들이 벼와 조의 껍질을 다 까주었다. 콩쥐가 입고 갈 옷이 없어 울고 있으니까 하늘에서 황소가 내려와 옷과 신발이 있는 곳을 알려주고 잔칫집에 타고 갈 가마와 하인을 불러주었다. 콩쥐는 잔칫집에 가는 길에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는데, 선비가 신발을 들고서 잔칫집에 찾아와서 신발 주인한테 장가를 들겠다고 했다. 신발이 팥쥐 발에 맞지 않고 콩쥐 발에 꼭 맞자 선비는 자기 찾던 사람이 콩쥐라며 그녀를 아내로 삼았다.

콩쥐와 결혼한 선비는 볼일을 보러 나가면서 다른 사람하고 목욕을 하러 가지 말고 목욕을 하더라도 먼저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팥쥐가 와서 선비가 시켰다며 목욕을 하러 가자고 콩쥐를 끌고 갔다. 목욕을 간 콩쥐가 먼저 물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자 팥쥐는 콩쥐를 번쩍 들어서 연못에 빠뜨렸다. 그렇게 콩쥐를 죽인 팥쥐가 콩쥐 행색을 하고 집에 앉아 있는데 선비가 와서 보니 아무래도 다른 사람 같았다. 왜 그리 얽었냐고 하니까 메밀 멍석에 엎드렸다가 그리 됐다고 하고, 왜 그리 푸르냐고 하니까 팥 멍석에 엎드려 있어서 그리 됐다고 했다. 어느 날 선비가 연못에 갔다가 예쁜 꽃 한 송이를 발견하고 꺾어왔는데 그 꽃이 선비를 보면 춤을 추고 팥쥐를 보면 머리를 쥐어뜯었다. 팥쥐는 꽃을 아궁이에 집어넣어서 불태웠다. 이웃집 노파가 불을 빌리러 왔다가 아궁이에서 빨간 구슬을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갔더니 예쁜 색시가 나왔다. 색시는 노파한테 선비를 청하여 식사를 대접하게 하면서 젓가락을 짝짝이로 놓게 했다. 선비가 밥을 먹으려다 젓가락이 짝짝이인 것을 보고 뭐라 하자, 콩쥐가 나타나 젓가락 짝은 알면서 계집이 바뀐 건 모르냐고 타박했다. 선비를 되찾은 콩쥐는 팥쥐를 죽이고 그 몸으로 반찬을 해서 어미한테 갖다주었다. 고기반찬인 줄 알고 음식을 먹은 계모는 그게 팥쥐라는 사실을 알고 데굴데굴 구르다 죽었다. 콩쥐는 선비하고 오래오래 잘 살았다.

앞부분은 익숙하지만 뒷부분은 낯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내용을 보면 왜 전래동화에서 이 대목을 생략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매 사이에 죽고 죽이는 복수전이 한 편의 공포물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죽은 팥쥐의 몸으로 음식을 해서 어미한테 먹게 했다는 것은 엽기의 극치로 보일 정도다. 여기서 상기해야 할 사실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상상적 이야기로서의 민담이라는 사실이다. 이 파격적인 화소(話素)들은 실제가 아닌 상징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맞다. 어떤 상징인가 하면 앞서 말했던바 부모의 미움과 차별, 그리고 그에 따른 갈등과 모순에 얽힌 상징으로.

 

품안의 자식의 길과 내놓은 자식의 길

 

세상에는 이상할 정도로 자기 자식을 못살게 구는 엄마들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너희 엄마 계모 같다고 말하곤 한다. 이때 계모는 나쁜 엄마또는 사나운 엄마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계모라고 해서 다 나쁘다고 하는 뜻은 물론 아니다. 세상에는 친모보다 훌륭한 계모도 무척 많다. 그런 현실적 맥락보다 상징적 맥락에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맞다. 사람들은 흔히 전형적 표상 차원에서 언어를 사용하거니와, 그런 언어사용은 특히 옛날이야기에서 두드러지다. 계모 외에 마녀와 요정, 난쟁이와 거인, 공주와 왕자 등이 두루 여기 해당한다.

민담에서 계모로 표상화된 나쁜 엄마는 그 유형이 단일하지 않다. 최근에 우진옥은 설화 속 계모의 유형을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설명한 바 있다. 자식을 편애하고 차별하는 유형과 자식을 소유하고 착취하려는 유형, 자식을 분리해서 축출하려는 유형 등이 그것이다. 그 중 <콩쥐팥쥐>의 계모는 자식을 편애하고 차별하는 엄마의 전형적 사례가 된다. 동생인 팥쥐는 끔찍하게 아끼면서 언니인 콩쥐는 죽어라 미워하는 식이다. 이야기 속에서 많이 과장돼 있어서 남의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 세상에 이와 같은 엄마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자매든 형제든 또는 남매든 자식을 차별해서 사랑을 한쪽에 모아주는 엄마들 말이다. 아니, 엄마만이 아니다. 이는 아빠의 문제이기도 하며,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문제일 수도 있다.

<콩쥐팥쥐> 설화는 그 차별을 두 가지 형태로 구체화한다. 하나는 일을 시킴에 있어서의 차별이다. 한 아이한테는 나무호미로 험한 밭을 매게 하고 한 아이한테는 쇠호미로 무른 밭을 매게 한다. 둘 다 함께 일을 시키는 것처럼 보인다는 교묘한 외양 때문에 아프고 억울한 차별이다. 또 하나는 먹는 것에서의 차별이다. 저 엄마는 먼저 일을 마친 아이한테만 밥을 주겠노라고 하거니와, 자기가 사랑하는 딸한테만 밥을 주려는 술책이다. 먹는 것에서 차별받는 것만큼 슬프고 억울한 것이 또 없을 것이다. 두 딸에 대한 엄마의 그 차별은 잔칫집에 한 아이만 데려가는 것으로 거듭 자행된다. 더욱 심하고 노골적인 차별이다.

그 편애와 차별은 자식에게 큰 상처를 가져다준다. 자기를 보호해줘야 할 엄마한테서 받는 처사라서 슬픔이 더 크며, 바로 옆에 있는 다른 형제와 비교되는 처사라서 소외감과 박탈감이 더 크다. 이야기 속에서 콩쥐가 거듭해서 구슬프게 우는 모습은 차별받는 자식의 깊은 상처와 슬픔을 단적으로 표상한다. 그 상처는 몸 깊은 곳에 강하게 각인되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콩쥐가 선비와 결혼한 뒤에도 팥쥐를 선뜻 밀쳐내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팥쥐한테 극심한 폭력을 당하고도 맞서 싸우지 못하고 작은 구슬 속에 숨는 것은 그 트라우마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이와 같은 관계구도에 하나의 놀라운 반어를 제기한다. 상식을 따르자면 부모의 사랑과 보호를 받은 딸이 잘 되고 부모로부터 차별받고 소외된 딸은 못 돼야 하는데, 실제 결과는 완전한 반대였다. 콩쥐가 선비나 원님으로 표현되는 훌륭한 남자와 만나서 행복한 삶을 이루는 데 비해 팥쥐는 악귀 같은 삶을 살다가 처참하게 존재가 바스러지는 결말을 맞이하고 만다. 이에 대해서 불쌍한 콩쥐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과 응원, 그리고 팥쥐 모녀에 대한 거부감과 증오가 만들어낸 환상적 전개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보기에는 이 설화의 서사가 논리적으로 매우 정교하게 짜여 있고 깊은 상징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 엇갈린 행로는 부모가 품에 안고 보호한 자식과 관심 밖으로 내친 자식의 상반된 운명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

먼저 팥쥐의 행로를 보자면, 그는 엄마의 편애와 보호 속에서 쉽고 편안한 길을 걷는다. 쇠호미를 가지고 놀듯이 모래밭을 매고 오면 엄마의 환대와 따뜻한 밥이 기다린다. 부모가 준비해준 예쁜 옷을 입고 잔칫집에 가서 맛난 음식을 먹는 것도 당연한 권리가 된다. 좋은 것은 항상 자기가 갖는 것이 팥쥐의 방식이다. 콩쥐가 검은 소한테 얻은 귀한 음식을 자기 것인 양 빼앗아먹는 데서 이를 볼 수 있다. 몸에 밴 이러한 삶의 태도는 콩쥐가 잃어버린 신발이 자기것인 양 나서서 선비를 차지하려는 몸짓으로 이어지고, 급기야는 콩쥐를 밀어서 죽이고 그의 남편을 빼앗는 행위로 이어진다. 늘 엄마의 보호 속에 있었던 팥쥐는 스스로 귀한 것을 찾아낼 줄은 모르면서 남이 가진 귀한 것을 빼앗아서 자기 것으로 삼는 데 골몰한다. 그러한 의존적이고 박탈적인 삶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면 처참한 죽음이었다. 제 삶을 살지 못한 데 따른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콩쥐의 행로는 팥쥐와 단적으로 대비된다. 그는 필요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소외와 억압 속에 험난한 길을 걷는다. 나무호미로 힘들게 돌밭을 매고 집에 와도 기다리는 것은 핀잔과 박대뿐이었다. 그러한 상황은 더없이 슬프고 억울한 일이었지만, 콩쥐로 하여금 팥쥐와 달리 스스로 제 삶을 책임질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이 되어주는 것이기도 했다. 고혜경이 잘 지적한 것처럼, 이야기 속의 콩쥐는 부모 품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존재였으며 필요한 것을 스스로 찾아내고 해결하는 존재였다. 험한 밭을 매고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며 조 석 섬 벼 석 섬을 찧는 일을 콩쥐는 다 해낸다. 한 마디로 그녀는 노동하는 사람이었으며 생산하는 사람이었다. 소가 밭을 대신 갈아주고 두꺼비나 구렁이가 독을 막아주었으며 새들이 방아를 찧어줬다고 하지만, 그들과 접속해서 움직이도록 한 것은 콩쥐 자신의 힘이었다. 그들이 전부 대신 해준 것도 아니었다. 물을 길어서 독을 채우고 솥에 쌀을 넣어서 밥을 한 것 등은 콩쥐 스스로 행한 일이었다. 어찌 보면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거나 삽시간에 방아를 찧어낸 일 또한 콩쥐가 오랜 노동 과정을 통해 갖춘 경험적 노하우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어떻든 콩쥐는 스스로 문제를 감당하고 해결해 간다. 그리고 그렇게 움직여 가는 길에 남자를 만난다. 다른 사람이 찾아서 연결시켜준 남자가 아니라 스스로 발견한 남자였다. 남자가 콩쥐의 빛에 이끌려 와서 그녀의 손을 잡은 형국이다. 그 빛이란 소외와 고통을 감내하면서 분투한 삶에 주어진 보상이고 축복이었으니, 삶의 반어적 진실을 담은 절묘한 역설이라 할 수 있다.

콩쥐의 일련의 행로에서 특별히 주목할 한 가지 화소는 검은 소. 처음 밭을 맬 때부터 시작해서 지속적으로 콩쥐를 돕는 최고의 원조자가 바로 검은 소였다. 암소라고도 하고 황소라고도 하는데, 암소 쪽이 우세하며 더 잘 어울린다. 이 검은 소에 대해서는 죽은 친엄마의 환신이라고 보는 것이 거의 이견 없는 정설이었다. 화자들 스스로가 그 소가 죽은 엄마였다고 말한 자료들도 있다. 그런데 이 소를 친엄마로 확정할 경우 계모가 실제로는 친모를 표상한다고 하는 앞서의 관점과 충돌하게 되는 면이 있다. 콩쥐가 죽은 엄마의 품에 안기는 모양새가 돼서 퇴행적 면모로 치부될 수 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마음속에서 엄마를 불러내 힘을 낸 것이라고 해석할 여지가 있으나, 어떻든 충분히 진취적인 면모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이에 대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검은 소를 대자연의 모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적 관점이 될 수 있다. 콩쥐가 자연적 생명과의 교감을 통해 어려운 과업들을 해결하면서 자기 삶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하는 해석이다. 서사를 되짚어보면 콩쥐를 돕는 존재로는 검은 소 외에 두꺼비와 구렁이, 참새와 까치 등이 있는데 이들 또한 자연에 속한 존재로서 성격을 지닌다. 이들이 콩쥐를 돕는 것은 콩쥐가 노동이라는 신성한 과정을 통해 자연과 교감하고 접속하면서 그 힘을 자기것으로 삼는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단지 <콩쥐팥쥐>의 콩쥐에 해당하는 일만이 아니다. 신데렐라의 대표 유형인 독일 민담 <재투성이 아셴푸텔>에서 아셴푸텔을 돕는 존재 또한 개암나무와 비둘기로 표상되는 자연이었다. 아셴푸텔 또한 자연적 생명을 힘으로 삼고 빛으로 삼음으로써 존재의 실현을 이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성이야말로 이 민담의 원형적 면모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과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콩쥐가 검은 소의 배에서 음식을 꺼내는 화소라 할 수 있다. 임석재가 1930년대에 평안도에서 조사해 보고한 자료에는 콩쥐(콩중이)가 몸을 깨끗이 씻은 뒤 두 마리 암소의 밑구멍에 손을 넣어 뱃속에 든 음식을 꺼내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때 암소 뱃속의 음식은 대자연의 생명력 내지 생산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 꼭 어울린다. 콩쥐가 그 암소를 만나고 먹을것을 얻은 것이 밭일을 하는 과정에서였다는 사실도 심상하게 볼 일이 아니다. 콩쥐가 일련의 노동의 과정을 통해 자연의 생산성을 자기것으로 삼은 존재임을 잘 보여주는 과정이 된다.

이야기는 콩쥐가 암소 뱃속에서 음식을 얻었다는 말을 들은 팥쥐(팍중이)가 저도 해보겠노라고 나선 사연을 전한다. 콩쥐를 모방해서 암소 뱃속에 손을 넣었던 팥쥐는 한꺼번에 많은 음식을 움켜쥐는 바람에 손을 빼내지 못하고 소에게 끌려다니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한다. 콩쥐가 자연으로부터 필요한 바를 적절히 얻어내는 이치를 따른 데 비하여 팥쥐는 평소에 그랬듯이 일방적이고 박탈적인 태도로 자연을 대한 결과로 큰 화()를 입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뒤에 팥쥐가 콩쥐의 남편을 빼앗으려고 나섰다가 존재의 말살이라는 큰 화를 입게 되는 것과 거의 정확하게 의미맥락이 통하는 내용이 된다. 요컨대 팥쥐가 화를 입어 죽음을 당하는 것은 완전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할 수 있다. 권선징악(勸善懲惡) 식의 교훈적 의미보다 더욱 본질적인 차원의 원형적 섭리에 해당한다.

이치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팥쥐의 몸을 반찬으로 만들어 그 어미한테 먹이는 일은 너무 잔인하고 엽기적이지 않은가 반문할 수 있다. 어떤 자료는 팥쥐를 젓갈로 만들어서 어미한테 보냈다고 하거니와, 엽기의 극치라 할 만하다. 실제의 일로 상상하면 끔찍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또한 상징의 코드로 읽는 것이 설화적 서사에 어울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징인가 하면, 팥쥐의 삶이 곧 젓갈과 같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곯은 삶이었다는 뜻이다. 엄마한테 안온하게 의지하는 가운데 남의 것이나 빼앗으려드는 삶이니 죽기 전에 이미 젓갈 같은 존재였다고 할 만하다. 그 젓갈을 어미한테 먹이는 것은 네가 자식을 어떻게 키웠는지 한번 보라고 하는 일이 된다. 도망갈 수 없는 진실 앞에 그 어미 또한 울부짖으면서 쓰러지게 되는 바다. 의타적이고 박탈적인 삶을 잉태하여 키워낸 나쁜 부모의 필연적 귀결이다.

 

콩쥐와 팥쥐, 한 존재의 두 모습?!

 

이야기 속의 계모가 친엄마의 다른 모습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이다. 자식을 미워하고 괴롭히는 친부모들이 세상에 가득하다. 콩쥐와 팥쥐의 엄마처럼 자식을 차별하는 부모 또한 한둘이 아니다. 대놓고 차별하는 경우 외에 은근히 차별하는 경우까지 치면 그 수치는 수십 배로 증가할 것이다. 마음속에 편애와 차별의 심리를 품고 있는 경우까지 포함한다면 세상 대다수 부모가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부모는 어떤 식으로든 마음 속에 팥쥐 엄마를 품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편애와 차별은, 제대로 절제되지 못하고 노출될 때, 자식들 모두한테 독이 된다. 차별을 당하는 자식의 마음에는 소외감과 상처가 자라나고 저항감과 복수심이 깃든다. 그 저항감은 차별하는 부모와 사랑받는 형제한테 동시적으로 향하게 된다. 콩쥐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한편, 차별적으로 편애를 받는 자식의 경우에는 마음속에 눈에 근거없는 우월감과 함께 부모에 대한 의타심이 자리잡게 되며 자기중심적인 생활 태도가 몸에 배게 된다. 노력 없이 남의 것을 탐하고 빼앗는 박탈적이고 파괴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이 크다. 팥쥐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저 팥쥐 엄마는 콩쥐와 팥쥐 모두한테 계모노릇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교하자면 팥쥐한테 더더욱.

또 다르게 생각하면 콩쥐와 팥쥐는 한 존재의 두 모습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이야기 속의 콩쥐와 팥쥐가 같은 사람이었다는 말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런 방향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해석상 무리가 따르는 것 같다. 이에 대하여, 부모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세상 수많은 아들딸의 내면에 콩쥐와 팥쥐의 두 모습이 함께 있다는 것은 아주 적실한 설명이 된다. 세상의 수많은 자녀들은 다른 형제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또는 다른 부모의 자식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때로는 콩쥐 같은 존재가 되고 때로는 팥쥐 같은 존재가 된다. 두 경우가 다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지만, 그중 더 심각하고 무서운 쪽은 팥쥐의 서사다. 콩쥐의 서사가 소외감과 상처를 감내하여 극복함으로써 자기실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데 비해 의타적이고 박탈적인 삶을 특징으로 하는 팥쥐의 서사는 폭력의 길이나 자멸의 길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미처 모르는 채로.

콩쥐의 길과 팥쥐의 길 가운데 어느 길로 나아가는가 하는 것은, 또는 그와 또 다른 제3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다른 누구한테 달려 있는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는 부모의 몫이겠지만, 자기 자신의 몫이 더 크고 결정적이다. 저 팥쥐한테 어찌 의존과 박탈에 안주하는 길만이 있었겠는가. 길은 찾기 나름이다. 우리 마음속의 팥쥐로 하여금 나무호미를 잡아서 쥐게 하고 형제에게 따뜻하게 손 내밀도록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남의 삶로부터 나의 삶으로 돌아오는 결단이다. 이 설화가 전해주는 궁극의 메시지가 여기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본 자료 및 더 읽을 거리

 

* 기본 자료

권은순 구연 콩쥐 팥쥐’. 한국구비문학대계 1-9, 460-466.

콩쥐 팥쥐’. 임석재전집 1, 한국구전설화 평안북도편 1, 평민사, 1987, 133-139.

 

* 참고 논저

고혜경, 선녀는 왜 나무꾼을 떠났을까?, 한겨레출판, 2006.

김헌선최자운, 신데렐라와 콩쥐팥쥐 이야기의 비교 연구, 경기대학교인문논총 12, 2004.

오윤선, 세계의 신데렐라유형 이야기군 속에서의 콩쥐팥쥐 이야기 고찰, 동화와번역 11, 2006.

우진옥, 고전서사 속 나쁜 엄마의 유형과 자식의 대응에 대한 연구, 건국대 석사학위논문, 2015.

이혜정, <콩쥐팥쥐>의 농경신화적 성격,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2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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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30. 937
55 두 형제의 우여곡절과 인생이라는 험로
2014.09.09. 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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